기괴한 풍자화가 보쉬 작품

기괴한 풍자화가 보쉬 작품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 또는 Jerome Bosch, 1450년경 ~ 1516년 8월)는 네덜란드의 화가입니다. 상상 속의 풍경을 담은 작품들로 유명하다. 20세기 초현실주의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고 여겨집니다.https://buly.kr/E765pVr

보쉬는 네덜란드 출신 화가로 ‘초기 네덜란드파’라고도 하는 플랑드르파의 대표 주자 중 하나로 꼽힙니다.

1450년경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1516년 사망하여 동년 8월 9일 장례미사가 거행되었다. 보쉬의 그림은 환상적이고도 독특한 화풍이 특징입니다.

인간의 타락과 지옥의 장면을 소름끼치게 표현하였기 때문에 지옥의 화가, 혹은 악마의 화가라 불렸습니다.https://buly.kr/D3bXwEn

1 보쉬의 생애

히에로니무스 보쉬는 오늘날 네덜란드 남부 노르트브라반트 주에 속하는 스헤르토헨보스에서 주거하며 활동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는 이름인 보스 역시 이 도시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보쉬를 ‘보쉬’라 부른 최초의 예는 1504년 부르고뉴 공국의 대공이자 네덜란드의 군주인 미남왕 필리프의 ‘최후의 심판’ 제단화 의뢰로 보입니다. 이 제단화 의뢰에서 왕은 보쉬를 ‘보쉬라 불리는 예로니무스 반 아켄’이라고 칭합니다. 보쉬가 활동하던 시기 스헤르토헨보스는 브라반트 공국의 중심 도시 중 하나로서, 농업 지대의 중심지이자 발전하던 상업 도시였습니다.

당시 스헤르토헨보스는 종교 부흥이 크게 일어나던 도시 중 하나였는데, 수많은 수도원과 수녀원이 도시 내외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보쉬 역시 자신이 거주하던 당대 도시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그의 작품에 반영되었습니다.

보쉬의 가문은 14세기 말 ~ 15세기 초 사이 스헤르토헨보스에 정착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의 본명인 예룬 반 아켄(Jeroen van Aken)의 반 아켄(van Aken)이라는 성은 독일의 도시 아헨을 가리키며, 그들의 출신이 독일임을 말해줍니다. 보쉬의 집안을 보면 보쉬의 형인 호센 반 아켄(Goossen van Aken), 아버지 안토니우스 반 아켄(Anthonis van Aken)과 할아버지 얀 반 아켄(Jan van Aken) 역시 보쉬와 같은 화가였으며, 보쉬의 삼촌 세 명도 화가였던 미술가 집안이었습니다.

보쉬의 출생과 생애, 작품 활동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는데, 보쉬는 일기나 편지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가들은 그의 행적을 조사하기 위해 스헤르토헨보스 시(市) 문서나 성모 마리아 형제회의 회계 장부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보쉬의 사생활이나 출생일 등을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쉬의 이름이 최초로 문서에 언급되는 것은 1474년 스헤르토헨보스 시 문서이며, 그의 두 형제와 한 명의 누이가 같이 기재되었습니다.

1479 ~ 1481년 사이에 보쉬는 그보다 몇 살 연상인 알레이트 고이아르츠 반 덴 메르베네(Aleyt Goyaerts van den Meerveen)라는 여성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녀의 가문은 부유했기 때문에 상당한 재산을 갖고 있었습니다.

1486 ~ 1487년 당대 네덜란드 북부와 베스트팔렌에서 세력을 떨치던 성모 마리아 형제회(화어: Illustre Lieve Vrouwe Broederschap)의 구성원 명단에서 최초로 보스의 이름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보쉬의 가문은 대부분 이 종교회 소속이었고, 형제회로부터 다양한 예술 작품 의뢰를 맡았습니다. 보쉬의 아버지 안토니우스는 형제회의 예술고문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보쉬 역시 기록만으로도 1493 ~ 1494년 형제회 신축 예배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 1511 ~ 1512년 십자가에 못 박하신 그리스도 상, 1512 ~ 1513년 샹들리에 디자인 등 형제회로부터 다양한 일을 의뢰받았습니다. 성모 마리아 형제회의 보스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1516년 그의 사망 기록으로, 동년 8월 9일 형제회는 성 요한 교회에서 보스를 추모하는 장례 미사를 거행하였습니다.https://buly.kr/D3bXwEn

보쉬
보쉬

 

2 보쉬 화풍

보쉬 작품은 고요하고 신비로운 상상력, 신화, 종교적 주제, 도덕적인 비유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룹니다.

히에로니무스 보쉬는 자연의 상상력과 독창성으로 인해 ‘기생’이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대표작 중 하나는 “쾌락의 정원”시리즈입니다.

이 작품은 수많은 도면과 상상력이 광대하게 펼쳐져 있는데, 지옥의 공포스러운 풍경과 괴이한 생물, 상징적인 요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작품은 종교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인간의 타락과 죄악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작품에는 종교적인 주제 외에도 “지구상의 정원” 같은 자연의 풍경을 그린 작품들도 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섬세한 디테일과 비현실적인 모티프들로 유명하며, 그의 특이한 시각적 표현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작품은 그의 생전에도 평가가 높았으며, 그의 특이한 화풍은 후세에 미술사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보쉬
보쉬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

(네덜란드어: Tuin der lusten)은 히에로니무스 보쉬가 1490~1510년쯤에 그린 작품으로 1939년부터 현재까지 프라도 미술관에 안치되어있습니다.

이 작품은 3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의 쾌락이라는 주제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보스의 가장 유명한 작이며 현재까지도 그의 독특한 풍경으로 해석이 난해한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인간의 세속적인 탐욕들이 그의 상상에 맡겨져 그려졌습니다.

왼쪽은 천국을 상징하며, 중간은 인간의 세계, 오른쪽은 지옥을 상징합니다. 왼쪽에는 예수처럼 생긴 형상이 있으며 아담과 하와를 그린것으로 보입니다. 중간에는 인간의 육욕, 식욕, 그리고 죄악들이 그려졌으며 오른쪽에는 지옥을 상징하듯이 기괴하고 이상한 형체를 가진 자들이 그려졌습니다.https://buly.kr/CmEL9a

만약 원죄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이 지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림이 그려진지 500년도 더 된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세 폭 제단화, <쾌락정원>은 늘 우리를 매혹하고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해 온 이 질문에 대해 화가의 해답을 보여줍니다.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쾌락정원>은, 환상적인 장면과 불가사의한 묘사로, 그러한 존재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이 그림은 그의 대표작인 세 폭 제단화로, 다행히 잘 보존되어 왔다. 게다가, 최근에는 훌륭한 복원과정을 거쳤습니다.

보쉬의 다른 많은 작품들처럼, <쾌락정원>은 관람자들을 그 자리에서 멈추게 하는데 그 흡입력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일반적인 풍속화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은 놀랍다기보다 충격적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그러하듯이, 충격을 받고 그림에 빠져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종말론적이고 끔찍한 꿈을 꾸는 듯 한 장면과 망상 속으로 생명을 불어넣는 화가의 믿기 힘든 상상과 창조의 힘에 사로잡히고 놀라워했습니다.

네덜란드 미술사학자 Carel van Mander가 언급한 표현을 빌리자면, 관람객들은 “보기에 무섭다기보다는 약간은 불쾌한, 환상적이고 기이한 공상들…” 이라고 하면서도 그것을 다루는 데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러한 15세기 초현실주의의 예술이 사실은 연금술 및 점성술의 전통 속에 숨겨져 있었던 것일 수도 있을까? 그는 그의 음울한 도안을 중세마술의 소용돌이치는 안개 속에서 끌어 냈을까? 그것은 중세시대 사람들의 희망과 두려움에 대해 단순히 알 수 없는 회상의 환각작용으로 그려진, 부도덕한 상상의 허구였을까?

보쉬의 그림은 사람들의 말문을 막히게 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질문으로 쩔쩔매게 하며, 작품에 대해 완전히 모순된 해석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한편 보쉬는 난잡한 성행위와 그들의 종교적인 행동의 한 부분을 추잡하게 만듦으로써 순결함의 상태에 도달하기를 희망하는- Adamites의 분파에 속했었음이 틀림없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Adamites: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 이 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모임을 낙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몬타누스파, 마니교도 등 이단 종파들에게 이와 같은 이름을 붙였습니다.

1421년에 보헤미아의 다보르파라는 교파의 영구적인 호칭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약탈을 일삼았으며, 야간 무도회에서 야만적인 행위를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에피파니우스나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옷을 벗고 생활하여 인간 본연의 상태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으며, 지하실에서 예배를 드리고, 일반 사람들과의 교제를 회피하였습니다.

질문들과 난관들-아직 한 번도 정확한 답을 얻어내진 못했지만, 이 그림은 우리의 ‘발견을 위한 여행’을 늘 새롭게 만들며 우릴 초대합니다.

이 특이한 전원의 목가적인 장면 혹은 타락한 성적 광기를 어느 정도로든 명백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덤불을 너무 많이 파내거나 잘라내지 않아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노출되어 있는 이 낙원의 정원에는 무엇이 있을까?

<쾌락정원>은 여러 가지 추문(scandal)들로 가득 찬 그림입니다. 그 추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될 수 있고, 종교적인 배경 안에 난폭하고 떠들썩하고 성적인 장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그림은 애초에 제단에 놓을 의도는 없었지만, 중심 패널에서 양쪽으로 퍼져나가는 접을 수 있는 양 날개를 가진 세 폭 제단화입니다.https://buly.kr/Ezfsjug

“쾌락의 정원”은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가 그린 대표작 중 하나로, 그의 예술적 스타일과 독창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지옥의 정원” 시리즈에 속하며, 지옥과 쾌락, 그리고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비유를 풍부하게 담아내었습니다.

“쾌락의 정원”은 16세기 초반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작품 전체에는 다양한 상징과 이야기가 풍부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대략적인 내용을 통해 인간의 타락과 육체적인 욕망에 대한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줍니다.

작품에는 다양한 동물, 기묘한 생물, 성스러운 및 세속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며, 이들이 서로 얽혀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세속적인 유혹과 쾌락이 동물적인 모습으로 표현되고, 종교적인 심벌과 도덕적인 가르침도 작품에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특유의 상상력, 비판적인 시각, 세밀한 디테일 등이 돋보이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예술가들과 연구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쾌락의 정원”은 그의 예술적 유산 중에서도 특히 그의 독창성과 특이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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